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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쓰는 이야기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서평

#9 서평 : 마야 뒤센베리,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은밀하고 뿌리 깊은 의료계의 성 편견과 무지』, 김보은, 이유림 옮김, 윤정원 감수, 한문화 (2019)

    의사가 여러분의 통증 호소를 제대로 듣지 않고 무작정 '스트레스' 때문이라며 안정 취하고 스트레스받지 말라는 말만 반복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그리고, 그런 의사의 반응이 여러분의 성별 때문인가 하고 의심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 책은 그런 경험이, 모든 여성이 얼마나 흔하게 겪을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한국어 번역판 제목은 "'왜' 믿지 않는가"라는 질문의 형식을 취하면서 그 '왜'에 답할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원인을 분석하기보다는 현상을 고발하는 성격이 강한 책입니다. 원서 제목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인 "Do no harm"을 비틀어 지은 "Doing Harm"으로, 의료가 환자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Do no harm)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반하며 얼마나 넓은 분야에서, 얼마나 자주 그 반대를 행하는지(Do harm)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저자인 마야 뒤센베리는 이 책의 주제를 "환자가 받는 의료에 젠더 편향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즉 "의료계의 젠더 편향"이라고 말합니다. 이 의료계의 젠더 편향 문제를 크게 지식의 간극과 신뢰의 간극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지식의 간극은 기초 과학 연구가 남성 중심적으로 되어온 탓에 여성의 몸과 질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신뢰의 간극은 여성 환자의 말을 의사가 믿지 않거나 여성의 증상을 쉽게 '마음 탓'으로 돌려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자궁 관련 질병에 대해서 이야기하긴 하지만 재생산권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시작부터 못을 박고 있는데요, 그러면서 '여성 건강'이 '재생산 건강'과 쉽게 동치로 여겨지는 것을 비판합니다. 이 부분은 저도 항상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입니다. 재생산 건강은 여성이 겪는 다양한 건강 문제의 일부분일 뿐인데, 임신과 출산이 여성 건강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죠. 남성의 신체를 '디폴트'로 두고 여성은 그 '디폴트 신체'에 자궁이 더해진 '특이 케이스' 정도로 바라보기 때문에 여성 건강과 재생산 건강이 쉽게 동치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의 간극 - 남성 중심적인 의학 지식 

    많은 생의학 연구는 남성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치거나, 여성에게 더 흔하거나, 여성과 남성에서 원인과 양상이 다른 질병에 대해서는 그 치료법과 시술에 대한 연구가 잘 시행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심장질환은 여성과 남성에서 발생하는 양상이 다르며, 편견과 다르게 여성에게 적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데도 여성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양상과 원인은 연구비 지원이 적어 잘 연구되지 않습니다. 또한,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분야인 산부인과학에도 지원이 매우 부족합니다. 

    또한, 신약 개발 과정에서 임상 시험의 대상으로 가임기 여성, 임신한 여성의 참여를 금지하는 정책 또한 여성들이 의약품 부작용을 더 많이 겪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신약 임상 시험에서 여성이 배제된 이유로 20세기 후반 미국의 보호주의 정책을 한가지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미국의 FDA는 "'강요나 과도한 영향력에 취약할 수 있어서' 특별한 보호 장치가 필요한 시험 대상자"를 명시하는데요, 여기에는 어린이, 죄수, 정신장애가 있는 사람,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과 더불어서 임신부가 포함됩니다. 임신 전의 여성도 임신 후의 여성도 똑같은 사람일 뿐인데,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되면 어째서 갑자기 '강요'나 '과도한 영향력'에 취약하게 된다는 것인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FDA는 위의 규제에 더불어서 목숨을 위협하는 질병이 아닌 이상 "가임기" 여성이 초기 단계의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걸 막았는데요, 레즈비언이든, 비혼이든, 피임 중이든, 남자 배우자가 정관수술을 했든 모두 상관없이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여성 당사자의 의사 또는 상황과 관계없이 여성이라면 모두 '걸어 다니는 자궁' 취급을 하면서 '미래의 잠재적인 아이'만을 생각하는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잠재적인 아이를 위한 일이라면, 임신에서 정자를 제공하는 남성은 어째서 임상 시험에 참여할 수 있는 걸까요? 임상 시험은 신비스럽게도 남성의 생식기에는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지만 여성의 생식기에는 너무나도 큰 영향을 미치는 걸까요?

    연구자들은 남성만을 연구 대상을 포함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할 때, 첫째로는, 여성과 남성은 생식기관을 제외하면 아주 비슷하다고 주장하거나, 둘째로, 여성과 남성은 너무 달라서 연구 모집단의 균일성을 파괴해서 연구 결과를 부정확하게 만든다 (책에서는 "혼돈을 일으킨다"고 번역되어 있는데요, 제 추측으로는 원서에선 confounding factor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고 설명합니다. 놀랍게도 첫 번째 주장과 두 번째 주장은 완전히 상반되고, 또 두번째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연구자들 스스로 여성과 남성을 모두 포함하여 연구하고 두 젠더간의 차이까지도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에서뿐만 아니라 동물 실험에서조차도 수컷 쥐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가 아주 많습니다. 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고착된 관행으로, 연구자들의 흔한 변명으로 "암컷 쥐는 생리 주기 때문에 호르몬 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이 있는데요. 암컷 쥐라고 해서 특별히 호르몬 적으로 불안정하지 않고, 수컷 쥐도 흥분 정도에 따라 테스토스테론의 변화가 있습니다. 제가 석사과정에 다닐 때, 학과 세미나에 바이오 연구를 하시는 분이 초청된 적이 있었는데요, 이 세미나에서 연사분께서 '흔히 암컷 쥐가 호르몬적 으로 불규칙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암컷 쥐는 호르몬의 사이클이 있어서 예측 가능한 변화가 규칙적으로 일어나지만, 수컷 쥐의 호르몬 변화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불규칙적이고 불안정하다'고 말씀하셨던 걸 충격적으로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레퍼런스를 명확하게 메모해뒀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리고, 만약 호르몬 변화가 실험 결과에 영향을 줄 만큼 중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에 대한 연구를 해서, 생리 주기 초반에는 이러하고 후반에는 이러하고 생리 중에는 이러하다는 연구 결과를 내야 하는 것이 아닌지요? 

    저자는 이에 대해 최근 25년간 성/젠더 차이를 증명하는 연구들이 계속 출판되어왔기 때문에 성/젠더 차이를 분석하는 연구가 꼭 필요함을 설파합니다. 최근 유명 저널들에서는 젠더를 명시하고 여남 모두를 포함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데요, 변화에 대한 저항 때문에 매우 느리게 변화하고 있는 데다가, 이미 오랜 시간 축적된 지식을 따라잡기에 걸리는 시간은 매우 오래 걸릴 것이기 때문에, 계속 압력을 행사하면서 여성을 포함한 지식 축적의 체계를 구축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의학 연구에서 여성과 남성의 질병 양상/약물 반응 등의 차이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에 저는 한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페미니스트 논의에선, 여성과 남성이 생물학적으로 다르지 않다, 여성의 뇌가 남성의 뇌보다 열등하지 않다, 여성은 (진화심리학적으로) 어떠어떠하며 남성은 어떠하다, 하는 논의들을 반박해야만 했고, 여성이 남성보다 생물학적으로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설파해야만 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또한, 여성과 남성이 가지는 차이가 생물학적인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인지 우리는 명확하게 선을 그어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과 남성의 의료적 차이를 연구하는 것은 자칫 여성과 남성의 근본적 차이와 우열을 말하는 아주 오래된 논의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는 젠더 분석을 할 때에 아주 조심스럽고 정확한 언어를 써서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연구자들이 젠더 차이를 분석하는 걸 꺼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칫하면 '언피씨'한 연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피해버리는 것이죠. 마치 젠더/성별 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듯이요. 

 

신뢰의 간극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여성과 건강의 영역에는 유구한 '히스테리'의 역사가 있습니다. 히스테리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여성들의 다양한 증상과 질병들이 간과되었습니다. 히스테리라는 말을 의학적 용어로 사용하지 않게 된 지금에도 히스테리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많은 여성들의 증상 호소가 '심인성'일 뿐이라는 진단으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러니까 "아직" 밝혀진 의학 지식이 부족한, 신체 증상에 대해서 의학은 그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기보다는 '그 증상은 마음에서 온 것'이라고 설명하기를 택합니다. (신체화 장애, somatization disorder) 이런 심인성 진단은 여성이 훨씬 많이 받습니다. 물론 정신적 문제가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반대로 신체적 증상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지속되어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너무 쉽게 심인성 진단을 내리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노력해보세요." 라는 말을 하는 것은 환자에게도, 의학의 발전에도 모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의학이 그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절대적 진리로서의 권위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수전 웬델의 『거부당한 몸』에 더 자세하게 나와있습니다. 

    내분비 이상, 신경장애, 자가면역 질환 등은 1차 징후가 정신과적 증상으로 나타나고 여성에게 더 흔하다고 합니다. 그런 정신과적 증상이 다른 질환의 징후일 것으로 생각하고 진단과정에서 더 탐구하는 대신, 여성은 정신과적 신경증(히스테리 또는 신체화 장애 등)가 흔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쉽게 심인성 질환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것이죠. 그러면 여성에게서 심인성 질환이 더 흔하다는 통계가 생기게 되고, 이는 다시 기존 고정관념을 강화하게 되고, 그 강화된 고정관념은 또다시 여성의 질환을 심인성 질환으로 더 많이 오진하도록 이끕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제가 속해있는 책 토론 모임에서 다루었는데요, 그 모임에서, 여성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건 꼭 진료실 안에서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 전반적인 문제라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언제나 여성은 쉽게 의심받고, 비전문적이라 오해받고, 감정적/비이성적이라는 편견 어린 시선을 견뎌야 하니까요. 그 때문에 여성에게 정신과 질환의 발병이 높고 약물 중독 또한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책에서는 여성의 질병이 과도하게 '심인성'으로 진단되는 문제를 지적했지만, 가부장제에서의 차별 때문에 정신과 질환을 가지게 된 여성도 실제로 정말 많다는 것이죠. 

    이런 문제는 의사 개개인이 자신이 내린 오진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없어서 더욱 굳어지고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전 의사에게 오진받았던 환자가 새로운 진단을 받고서 그 예전 의사를 다시 찾아가 "당신의 진단은 오진이었다"라고 직접 알리기는 쉽지 않죠. 그리고 구조적인 피드백 시스템도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의사들은 자신의 오진율이 매우 낮다고 과신하는 경향을 보이고, 이는 계속해서 의사들의 진단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했던 경험을 비추어봐도 오진은 정말 흔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의 어느 주말, 겨드랑이와 등에 포진이 생겼는데 그게 대상포진인 것 같다고 기민하게 알아본 저희 엄마와 함께 응급실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응급실의 의사는 그게 대상포진이 아니라고 무심하게 말하며 "이건 아무리 봐도 대상포진인 것 같다"고 말하는 저희 엄마를 무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월요일에 다시 찾은 피부과에서는 대상포진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초기 치료가 중요한 대상포진임에도 발병 초기 이틀을 흘러보낸 저는 오랜 시간 후유증인 '대상 포진 후 신경통'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오진 피드백 시스템은 정말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고 이런 시스템이 없는 상황에서 환자의 '의료 쇼핑'은 정당한 방어 전략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의료계, 보건학 - 특히 보건경제 - 에서는 이런 과잉 의료 이용을 꼭 해결해야 하는 아주 큰 문제로 여기지만요.)

 

의료계의 젠더 편향은 질병을 가리지 않는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는 앞에서 말한 지식의 간극과 신뢰의 간극으로 인한 문제가 아주 다양한 질병에 걸쳐서 공통적인 패턴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는지를 지적합니다. 심장 질환 (3장), 자가면역질환 (4장), 만성 통증 (5장), 자궁내막증 (6장), 근육통성 뇌척수염, 체위성 기립 빈맥 증후군, 만성 라임병 (7장) 등 질병의 분야와 특성을 가리지 않고 여성의 증상 호소를 무시하고 신경증이나 건강 염려증으로 치부해버리는 진료실의 풍경과 그에 관심 기울이는 의사를 운 좋게 만나더라도 관련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제한된 진료만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여성에게 적게 나타난다는 편견이 있으나 실제로 그렇지 않은 질병(심혈관계질환, 만성폐쇄성폐질환 등)이든,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질병(자가면역질환 - 류머티즘 관절염, 다발성 경화증 등, 간질성 방광염, 편두통, 근육통성 뇌척수염)이든, 여성만이 겪은 질병(자궁내막증 등)이든 상관없습니다. 제대로 된 진단을 받지 못해 몇 년에 걸쳐 여러 명의 의사를 만나며 떠도는 과정에서 "의료 쇼핑하는 건강염려증 환자"라는 편견에 시달렸던 환자들의 사례가 책에 여럿 언급됩니다. 

    한편, 책 모임에서 저와 구성원분들은 책에서 서술한 것과 반대되는 (하지만 여전히 문제적인) 경험도 나누었습니다. 처방으로 간단하게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들에 대해서요. 영양제 시장이 그런 예시라는 의견과, 아토피 치료에서 스테로이드제가 부작용이 아주 많은데도 처방을 쉽게 해주는 경향에 대해서 서로 의견을 나눴습니다. 저는 체중 강박이 심하던 시절에 만났던 가정의학과 의사가 너무 쉽게 식욕억제제를 처방해주었던 경험을 나눴습니다. 이십 대 초반의 저는 '평균 체중'이었음에도 체중에 대한 강박이 아주 심했고 그래서 언제나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살이 잘 빠지지 않아서 혹시 갑상샘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러 병원을 찾았는데요 -- 그때의 제가 갑상샘 항진증일 리는 당연히 없었죠, 하루에 1600kcal만 먹는데 49kg이 되지 않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던 거니까요 -- 그때 의사 선생님은 너무도 빠르고 쉽게 식욕억제제를 처방해주었습니다. 체중 감소에 맹목적이었던 저는 처방받은 식욕억제제를 먹었고, 이후 다양한 부작용에 고통받았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저에게 필요했던 건 식욕억제제를 통한 과도한 체중 감소가 아니라 상담을 통해 체중에 대한 강박을 벗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식욕억제제를 처방받는 대신 상담을 추천받았더라면 제 인생은 훨씬 빨리 편해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그때의 어린 저는 콧방귀를 끼고 식욕억제제를 처방해주는 다른 의사를 찾았을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그게 '아하 모먼트'가 되어 상담을 빨리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

    책 모임에서는 제가 혼자서 책을 읽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여러 아쉬움도 서로 나눴습니다. 우선, 이 책에서는 아주 많은 문헌을 인용하고 있지만 그 방식이 정확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전 연구를 인용할 때, '몇 년도에 어떤 인구를 대상으로 어떤 실험/통계분석을 해서 어떤 결과가 나왔다'는 모든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어떤 인용에서는 전체 실험 대상이 누구였는지 말하지 않거나, 어떤 인용에서는 정확히 어떤 목적의 연구였는지 이야기하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이 책의 논의에 맞는 부분만으로 다듬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죠. 

    또한, 이 책의 번역 문제인지 아니면 원문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용된 연구에서 조사자의 60%가 여성이었다는 것인지, 연구 조사자 중 여성의 60%가 관련 문제를 겪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미국) 전체 인구에서 여성 중 60%가 그 문제를 겪는다는 것인지 불분명한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책의 중후반부에서는 다른 질병들에 대해서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에 대한 비판도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지적하는 주제 의식인 의료계의 젠더 편향이 질병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을 거라는 추측을 했고,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고 알게 되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지만요. 이런 글쓰기 방식 때문에 저는 후반부에서는 글에 대한 흥미와 집중력이 떨어졌고, 책 모임에서는 감정적인 동요를 일으키는 것 외의 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책의 제목이 "의사는 왜"로 번역된 탓에 한국어판 독자가 기대한 것과 저자가 실제로 쓴 글 사이에 갭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