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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쓰는 이야기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 서평 - 자본이 쫓아낸 사람들의 이야기


만보의 도시빈민 공부 시리즈 #2

최근 미국에서 새 도시로 이사하게 되어서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기업이 관리하는, 새로 지어진, 깨끗하고 월세가 비싼 대형 아파트에 살고 싶었다. (미국은 회사가 월세용 건물을 굴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집들은 월세가 비싸도 너무 비싸서 지어진 지 오래된 작은 건물의 아파트에 들어가기로 했다. 집을 보러 다니면서는, 내 월급이 좀 더 올라서 그런 고급 대형 아파트에 사는 날이 언젠가 왔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어떤 자본이 이런 대형 렌트 산업을 굴러가게 하는 걸까 이렇게 회사를 통해 렌트하는 건 세입자에게 한국보다 나을까 별로일까 이 큰 건물이 있던 땅엔 뭐가 있었을까 은연 중에 생각이 흘러갈 때도 있었지만 일단 내가 낼 수 있는 월세로 살만한 집을 구하는 게 급선무였다.

 
서울에서도 항상 비슷했던 것 같다. 잠실, 청계천, 서울역과 용산역, 광화문, 종로, 서대문, 상계동, 아현동, 독립문, 경의선 숲길. 『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 』(김윤영 저)에서 철거민, 홈리스, 노점상들이 쫓겨난 이야기를 다루는 지역들이다. 재개발 전과 후의 모습을 모두 속속들이 잘 알 정도로 자주 다니는 곳도 있고, 여기가 언제부터 이렇게 으리으리 삐까뻔쩍해졌는지 재개발 후의 모습이 낯설 정도로 가끔만 가는 곳도 있고, 지하철로만 지나다니고 실제로 내려서 땅을 밟아본 적은 없는 곳도 있다. 잘 아는 곳이든 모르는 곳이든, 내가 평생토록 기꺼이 누려왔던, 사랑해 마지않았던 서울의 인프라가 어떤 폭력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지 제대로 알지 않았다.
 
"서울의 아파트가 있는 자리라면 누군가는 그곳에서 쫓겨났다고 봐도 좋다." (p25)
 
이 책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문장이자 뒤통수를 크게 한방 맞은 것 같았던 문장이다. 막연히, 나도 브랜드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렇게 커다란 아파트가 한바가지인데 왜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아파트는 없을까 생각했다. 그런 나의 욕망만 생각했지 그 자리에서 누가 쫓겨나고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하는지에 대해선 너무나 무지했다. 우리 가족이 평생 살아온 이 동네에서도 커다란 아파트 합동 재개발이 이쪽에서, 저쪽에서, 진행됐었는데. 우리 가족이 사는 작은 빌라는 운좋게 겨우, 아직 그런 재개발의 바람을 맞지 않았을 뿐인데.
 
생각해보면 그냥 흔하게, 서울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초등학생 때 시끄러운 공사장 소음으로 잠못이루게 했던 이쪽재개발 아파트에는 누구네집이 몇억짜리 분담금 못내서 아예 다른 동네로 이사간다고 했다. 중학교 내내 공사장 옆으로 등하교하게 만들었던 저쪽재개발 아파트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있었다. 외할머니 사는 00동은 올림픽 때 그랬다고 했다 (책에도 나온다). 엊그제 다녀온 종로 근처 어느 건물에는 요란하게 "철거" "철거 중" "무단점거 금지" 등의 각종 문구가 스프레이칠 되어 있어서 저 건물도 피눈물 흘리며 떠난 세입자가 있었겠구나 생각했다. 서울 한복판 종로든 서울 변두리 우리동네든 낡은 건물 2,3층을 올려다보면 고시원, 고시텔, 리빙텔이 흔하게 있다.
 
"애초에 합동 재개발 자체가 민간 자본과 토지 소유주, 대형 건설업체를 참여시켜 정부의 부족한 재원과 행정력 문제를 해결하면서 주택을 공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사정은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개발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부동산 가치 상승으로 엄청난 이득이 돌아갔지만, 이는 그곳에 살던 가난한 주민들의 목을 죄었다. 이윤은 개발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피해는 여기서 쫓겨나는 이들에게 정확히 분담되었다." (p131)
 
구청, 시청, 건설회사, 철거용역업체, 자본을 가진 투자자들이 영합하여 가진 자들이 더 많은 돈을 누릴 수 있게 되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더 열악한 곳으로 계속 밀려난다. 아파트 개재발에, 공원 설립에, 철도역 증설에, 모두 공공자금이 투입되지만 그렇게 공적 자금으로 개발된 공간은 자본을 가진 이들이 소유 독점하며 그 자본이 없는 이들을 쫓아낸다. 잠실이든 종로든 청계천이든 이 책에 나오는 어느 지역이든 다 똑같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거칠고 대안 없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땅과 집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을 남에게 빌려주면서 세를 받아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권리. 이런 권리가 애초부터 인정되면 안됐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무너뜨린다거나 땅과 집의 소유권을 모두 무효화 하는 것은 현실성 없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자잘한 규제들이 꼭 필요한 것 같다. "풍요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는 대신 그 욕망을 조금은 눌러줄 수 있는 방안들, 그 욕망을 곧이곧대로 실현하기 조금은 어렵게 만드는 규제들. 가만히 두면 돈이 자석처럼 더 많은 돈을 부르는 자본주의이니, 그 흐름이 역행될 수 있게끔 해주는 재분배 정책. 그런 게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의 문제는 가난이 아니라 풍요가 아닐까. 오토바이 소음과 땀 냄새, 작고 구불구불한 골목과 영세한 공장들이 사라지고 큰 건물들로 채워진 공안을 '깔끔해졌다'고 여길 수 있는 순진함, '전세 두 번만 돌리면 원금을 상환할 수 있다'는 계산. 우리 모두가 공유한 풍요에 대한 욕망이 여기 깃들어 있다." (p181) 
 
큰 도시에 사는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어떤 피와 눈물 위에 지어진 곳인지, 어떤 탐욕이 그 피와 눈물을 만들어 냈는지 알게 해준다. 평생 살아온 도시임에도 자세히 알지 못했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전해준다. 김윤영 활동가가 직접 찍은 현장의 사진들이 울림을 더해준다.
 
하지만 이 제목을 이렇게 지은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이 책의 모든 꼭지마다 사람들이 쫓겨나고, 사람들이 죽고, 사람들이 슬퍼하고, 사람들이 투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본에 의해 내쫓겨진 철거민, 홈리스, 쪽방촌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거기에 제목을 "산책"이라고 지은 이유가 궁금하다. "가난한 도시 생활자의 서울 투쟁기"라던가 "서울이 쫓아낸 사람들" 같은 제목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하지만 "산책"이라는, 일견 이질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런 철거와 투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누군가에게는 그냥 삶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까 생각해 보았다.
 
7월에 이 책의 작가인 김윤영 선생님이 강연을 한다고 한다. 책에서 하도 큰 울림을 받았기에, 김윤영 선생님은 뭐 하는 분인가, 빈곤사회연대는 뭐 하는 단체인가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다. 세입자 권리 운동을 하는 단체인 민달팽이유니온에서 시리즈 강연을 기획했다. (링크) 김윤영 활동가의 강연은 7월 13일이다. 김윤영 선생님의 강연을 직접 듣는 것은 또 어떤 울림이 될지, 기대가 된다.
 
이 책의 마지막 단락을 여기에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민주화의 거리는 누군가에겐 출세의 든든한 씨앗이었다. 그러나 인생에서 수많은 실패와 작은 성공만을 쌓으며 언제나 겨우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흔히 보통이라 여겨지는 궤도와 조금 어긋난 형태로 세상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규칙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외곽을 확장시킨 진짜 힘이었다. 자신의 삶으로 세상과 불화하며 없던 길을 만들어 낸 사람들 모두에게 경의를 보낸다." (p255)
 
(원래 글 쓴 날짜 : 2024년 6월 28일. 블로그를 새로 만들까 하다가 그냥 원래 있던 블로그를 쓰기로 하고 글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