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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논문 읽는 이야기

『사당동 더하기 25』서평 : 25년간의 가난 관찰 연구

#4 『사당동 더하기 25』 서평 : 25년간의 가난 관찰 연구




사당동 더하기 25
이 책은 사회학 연구자인 저자가 80년대 사당동 철거촌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시작해, 상계동 영구임대아파트까지, 한 가족을 25년간 관찰 연구한 내용을 담은 책입니다. "한국 전쟁을 겪고 월남한 금선 할머니 세대부터 지금 초등학생, 중학생인 증손주 세대까지 가난이 어떤 방식으로 대물림되는지, 빈곤 재생산의 고리를 끊을 실마리가 있는지" 라는 질문을 가지고 진행한 연구입니다. 지난 번 <평등해야 건강하다>에서 불평등과 가난이 어떻게 건강을 악화시키는지를 보고, 제가 하고 있는 연구에서도 저소득층 노인이 중/고소득층 보다 훨씬 더 많이 사망하는 것을 데이터로 보면서, 가난한 삶, 가난을 겪어내는 삶의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접하고 싶어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방식
이 책에서 저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내용은 사당동이 처음에 생기게 된 이야기였습니다. 60년대 말 사당동은 서울에 편입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밤에 호랑이가 나온다는 소문도 있던 울창한 숲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당동 산 속에 충무로, 명동 일대의 불량 주거지에 살던 주민들을 트럭으로 실어다 날랐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쳐 집을 다 부수고 대기시킨 트럭에 강제로 태웠다"고 합니다.  

"서울시는 충무로 철거민에 뒤이어 중구 양동 철거민과 영등포구 대방동 철거민을 이곳의 산 12, 14, 15, 17, 20번지에 이주시켰다. 위 철거 지역에서 4,000명을 트럭으로 옮겨 정착시켰다. 사당동뿐 아니라 인근 봉천동이나 신림동, 난곡 등 서울의 유명한 산동네는 이런 식으로 철거당한 이주민들의 정착지였다." (109쪽)

이게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불량 거주지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인가?  어떻게 국가가 국민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는가?'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습니다. 

나중에는 사당동을 철거할 때 투입되었던 백골단 이야기도 나옵니다. 사당동 강제 철거에 반대하는 이주민을 내보내기 위해 흰색 헬멧을 쓴 조폭들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국가가 이런 식으로 무고하고 힘 없는 국민들을 폭압적으로 대한다는 것, 존엄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국가의 개발에 걸림돌로만 여기는 것, 어찌보면 그렇게 새로운 깨달음도 아닙니다만, 사람들을 트럭으로 강제로 실어날라 이주 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숲 속에 떨궈놓고 가는 장면을 상상하니 가난을 대하는 국가의 폭력적 방식이 더 무게있게 다가왔습니다.

처음 사당동으로 이주당한 사람들은 텐트를 치고 살다가, 날씨가 추워지니 텐트에서 자기가 어려워져 품앗이로 돌아가면서 사당동 산의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은 집의 주거 환경은 아주 열악했습니다. 화장실은 산꼭대기 갈대밭에 임시로 만든 변소를 사용했고, 수도도 설치되지 않아 10분 거리에서 길어다 먹었고, 비가 오면 방주 타고 나가야 할 만큼 고립된 장소였습니다. 

가난의 풍경
사당동 철거촌과 상계동 영구임대아파트에서 가난을 살아내는 이들의 일상이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사당동에서 관찰 연구를 할 때, 저자는 대학원생 조교들을 사당동에서 실제로 기거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대학원생 조교들은 사당동에서의 삶에 녹아들고 그 문화를 접하게 됩니다. 화투를 함께 치면서 어울리고, 일용직 노동 시장에도 함께 불려가고, 가내 부업일을 돕기도 합니다. 그 일화들을 통해 사당동 판자촌에서 사람들이 공유하던 문화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집안의 풍경도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한 집에 열여덟 가구가 세 들어 살며 각 1.4평짜리 방에는 네 식구가 살았습니다. 가스 배출구가 없어 늘 연탄 냄새가 배어 있고 수도가 설치되지 않아서 설거지, 세면 등은 마당에서 해야 했습니다. 여러 가구가 한 집에 살다보니 전기세, 수도세 등 공과금으로 인한 다툼도 자주 벌어졌습니다. 저자의 주 연구 대상인 금선 할머니 가족이 상계동 영구임대아파트로 이사한 뒤에는 주거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삼 대가 한 집에 살고 있는 것에 비해 집이 너무 좁아서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기는 커녕 "식구들이 모여 앉으면 방이 꽉 찼고 아이들은 기껏해야 엄마 무릎에서 (증조)할머니 무릎으로 그리고 할아버지 (수일아저씨) 무릎으로 옮겨 다니는 것이 다였다"고 묘사됩니다.

가난의 대물림,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사당동 거주민의 한 세대 위를 살펴보면 대부분 빈농 출신입니다. 이들에게는 가난을 탈출할 수 있는 사다리가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할 안전망이 없습니다. 의료보험이 없어서 갑자기 사고를 당한 아들의 병원비로 몇 천 만원의 빚을 지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보호망 없이 가난에 계속 내몰리게 되면 범법자가 되기도 쉽습니다. 돈이 급한데 돈을 구할 가망이 없고, 카드깡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 "주민등록증을 잠시만 빌려주면 몇 백 만원을 주겠다"고 한다면 솔깃한 제안일 것입니다. 빌려간 주민등록증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상관 없고, 당장 필요한 몇 백 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차명 거래에 명의를 제공한 범법자가 됩니다. 이 문제로 사기죄 고소 당하고 법원에서 소명하기도 어려워 벌금 400만원을 받은 사례가 책에 나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가난한 사람에게 벌금 400만원이라는 돈은 절대 만들 수 없는 돈입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 있는 사람을 돕기 위한 기금 같은 것이 있는지 알아보니 "꿈만 같은 일"이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합니다. 

국가와 시스템이 가난한 자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와중에, 그 궁지에서 어떻게든 살 길을 만들어보려는 행동이 인지하지도 못한 채 법을 어기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경제적으로 더 불안정한 상황으로 몰아넣어지는 악순환입니다. 국가가 소외된 이들에게 안전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선 밖으로 밀어넣은 뒤 '그 선을 왜 넘었냐' 탓하는 꼴입니다.

저자는 이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가난의 대물림"이라고 했습니다. 사당동 철거촌에서 상계동 영구임대아파트로 주거환경이 나아지면 가난도 나아질 것인지를 보려고 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계속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물론 너무나도 문제적이지만, 그것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고 계층 이동성이 있는 사회라 한들, 그 가난의 조건이 사람의 존엄을 빼앗을 만큼 열악하다면 "대물림" 뿐만 아니라 "가난" 그 자체에 문제가 있고, 사회는 가난의 최하치를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해야할 것입니다. 계층 이동성이 있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다른 누군가가 쉽게 빈곤층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말도 되기 때문입니다. 세대가 지나도 가난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가난에 머무르게 된다는 문제의식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장 가난한 사람이 어떤 정도의 가난을 겪는지, 그 가난은 어떻게 삶의 존엄성을 해치는지 그 자체에 집중하고 문제제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 덜 가난하게 사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의 현 상태만을 말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구조가 지워질 수 있으니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문제제기에서 "가난"과 "대물림" 사이에서 무게조절을 잘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빈곤 문화가 가난을 낳는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오스카 루이스가 <산체스네 아이들>이라는 책을 통해 만들어낸 개념인 '빈곤 문화'에 대해 비판하며 마무리합니다. 오스카 루이스는 빈곤 문화의 속성으로 잦은 폭력, 역사의식의 결여, 미래에 대한 계획 부족, 낮은 동기 부여, 약한 직업윤리, 약물, 알코올 중독, 혼전 동거, 성 문란, 도박 등을 꼽으며, 이런 속성들 때문에 빈곤이 재생산된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빈곤 문화가 아니라 빈곤이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즉, 위와 같은 특성 때문에 빈곤해지는 것이 아니고, 가난하기 때문에 위의 특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빈곤의 시작은 게으름이나 성적 문란이 아니라 한국 전쟁이었고, 월남해서 집도 남편도 없이 아이들을 길러야 하는 여성 가장을 보호할 국가적 대책이 없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머니 가족의 가난이 시작되었고, 그 이후부터 '빈곤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생활양식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빈곤이 먼저 있고 그 특성은 가난의 원인이 아니라 가난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지난 포스트에서 다룬 <평등해야 건강하다>에서 펼치는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 사회는 자주 가난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특성들을 거꾸로 원인으로 가져와서 "그러니까 가난하지"라며 가난의 책임을 가난한 이들에게 돌려버리고 맙니다.  날씨나 계절에 영향을 많이 받아 수입이 불안정한 건설 노동에 종사하면서  하루하루 겨우 먹고 사는 상황이라면, 일 년 뒤, 십 년 뒤를 제대로 계획할 수 있을까요? 미래에 대한 계획성이 부족한 것은 당면해있는 가난 때문이지, 계획 없이 살아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특성을 꼬집으며 탓하기 대신,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구조를 봐야합니다.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세계화의 직접적 영향권 안에 있으며 금융 자본주의 시대에 와서 이들의 가난은 더욱 개별화되고 제도화된 가난이 된다"고 말합니다. 웬만한 자본금 없이는 가게도 열기 어렵고 생계 수단은 점점 맨몸밖에 남지 않습니다. 세계화, 금융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자본주의적 재편 등의 구조적 상황 속에서 출구가 없는 빈곤 재생산의 굴레에 갇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25년 간의 끈질긴 관찰 연구
저는 데이터를 분석하는 양적 연구(quantitative research)를 하고 있어서, 질적 연구(qualitative research)는 생소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질적 연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질적 연구가 가지는 의미를 배웠습니다. 질적 연구는, 데이터를 다루는 양적 연구와 다른 힘을 가졌다, 다른 측면에서 아주 힘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데이터 분석을 이용해 말하는 것에는, 숫자와 통계가 뒷받침되어 있다는 면에서 힘이 있지만, 한편으론 그 때문에 사람들이 실제로 겪는 상황들은 무미건조하게 통계 아래로 숨겨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 노인의 사망률은 고소득층 노인에 비해 1.5배 높다"는 말을 보면 그저 그 말만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저는 그랬습니다). 반면에, 질적 연구는 저소득층인 어떤 개인의 삶을 따라가면서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삶의 궤적이 건강에 흠을 낸다는 것을 숫자 뿐 아니라 실체로서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어릴 때부터 막노동에 종사하며 부상 위험을 시달리는 것,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공장에서 움츠리고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는 것, 일상의 아주 작은 모든 것에서 또래에 비해 누릴 수 있는 게 너무나도 제한된 환경에서 자라는 것, 가난으로 인한 부모의 불화와 아버지의 폭력을 견뎌내느라 쪼그라든 마음 상태를 가지게 되는 것 등, 구체적으로 그 삶의 경험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통계와 숫자 아래에 실체가 있는 삶과 경험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걸 잊어버린 채 결과를 숫자 그대로만 해석해서 아프고 소외된 당사자들의 경험을 미묘하게 호도하는 해석을 내놓지 않기 위해서, 질적 연구를 계속해서 접하고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같이 읽으면 좋을 글
한겨레에서 나온 서평 
이 책의 연장선상으로, <사당동 더하기 33>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동과 세계>에 올라온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