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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쓰는 이야기

[논문] 사용 언어와 의료 이용: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면 의료 이용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5 (논문이야기) 사용 언어와 의료 이용: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면 의료 이용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병원에서 외국어로 소통해야 한다면
사용하는 언어가 의료 이용 만족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의사와 대화해야 한다면, 의사를 만나고 의료 서비스를 받을 때 '내가 필요한 서비스를 제대로 받았다'고 느끼는 비율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의료이용에서 언어는, 의사와의 의사소통에도 영향을 미치고, 전반적인 의료시스템과 의료보험제도를 이해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치고, 의약품을 제대로 복용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저도 한국에 있을 때는 의사와 대화하는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의료 이용에서 언어 장벽을 뼈저리게 느낀 건 독일에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의사와 독일어로 이야기할 자신은 없고, 의사도 저도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하는 건 더더욱 자신이 없어서 한국인 의사가 있는지 인터넷을 한참 뒤져서 멀리까지 찾아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약국에 갈 때는 구글 번역기 앱에 "생리통이 심해요"를 입력해놓고 아무 말 하지 않고 화면만 덩그러니 보여줬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이곳의 복잡한 의료보험제도를 몰라서, 그리고 악명 높은 surprise bill (의료 이용 후 아주 높은 금액이 고지된 청구서를 일컫는 말)에 겁먹어서 패닉이었는데요, 그런 걸 영어로 찾다보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게 바로 언어가 주는 의료 이해력(health literacy)에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그 나라의 공용어가 아닌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사용 언어가 의료에의 장벽이 되기 쉽겠죠. 

오늘의 논문 : 메디케이드 가입자의 인종 및 사용 언어별 만족도 조사 분석
오늘 소개해드릴 연구는 메디케이드 관리 의료(Medicaid managed care)에 가입된 소비자(환자)들이 자신들이 받은 의료 서비스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인종/민족과 언어에 따라 달라지는지를 살펴본 논문입니다. 보건정책관리 분야의 저명한 저널인 보건 서비스 연구 (Health Services Research) 에 2003년 출판된 <인종, 언어, 메디케이드 관리 의료에서의 환자의 평가 (Race/Ethnicity, Language, and Patient's Assessments of Care in Medicaid Managed Care)>라는 제목의 논문입니다. (Weech-Maldonado, R., Morales, L. S., Elliott, M., Spritzer, K., Marshall, G., & Hays, R. D. (2003). Race/ethnicity, language, and patients’ assessments of care in medicaid managed care. Health Services Research, 38(3), 789–808. https://doi.org/10.1111/1475-6773.00147)

메디케이드 관리 의료란?
여기서, 우선 메디케이드와 관리 의료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메디케이드 (Medicaid)는 주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미국의 공공보험입니다.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공보험이고, 자녀가 있는지, 장애가 있는지 , 임신한 여성인지 여부 등에 따라 소득 기준이 달라지고 주별로 복잡한 자격조건을 두고 있습니다. 메디케이드 운영 방식에는 행위별 수가제 (fee-for-service)가 있고 관리 의료 (managed care)가 있습니다. 행위별 수가제는 우리나라에서처럼,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받은 의료 서비스에 대해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입니다. 관리 의료는, 행위별 수가제에서 이윤 추구를 위해 과도하게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걸 줄이기 위해서 도입된 제도로, 의료 제공자 간에 네트워크를 만들고 의료 행위에 대해 지불할 때 행위별 수가제 대신 다른 다양한 방식의 지불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메디케이드 관리 의료에서는 개인별 균일 할당 (capitation) 방식으로 수가를 지급한다고 합니다. 보험 계약할 때 환자 명수에 따라 한 명당 고정된 금액을 지불하고, 그 안에서 의사들이 비용 관리를 하도록 하는 것이죠. 이 논문이 분석한 데이터인 2000년도에는 14개 주가 관리 의료 방식으로 메디케이드를 운영했다고 합니다. 현재는 미국 총 50개 주 중 40개 주가 관리 의료 방식으로 메디케이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kff.org/medicaid/issue-brief/10-things-to-know-about-medicaid-managed-care/)

이 논문은 National CAHPS (Consumer Assessment of Health Plans Study, 건강 보험에 대한 소비자 만족도 조사) Benchmarking Database의 데이터를 사용했고, 2000년도에 메디케이드 관리 의료 플랜에 가입되어 있던 49,327명의 성인들을 대상으로 분석했습니다.  CAHPS는 의료 보험과 의사들이 가입자들의 니즈를 잘 충족시키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설문입니다. 

주요 독립 변수는 인종/민족과 사용 언어였는데요, 백인, 히스패닉, 아시아인 그룹은 주사용 언어별로 그룹을 나누었습니다.  백인과 아시아인은 영어 사용 또는 비영어 사용 그룹으로 나누었고, 히스패닉은 '집에서 사용하는 언어' 질문에 대한 답변과 설문에 참여한 언어를 모두 고려하여 영어 사용 히스패닉, 바이링구얼 히스패닉, 스페인어 사용 히스패닉의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언어 사용 별로 나누지 않은 인종 그룹으로는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 흑인 및 백인, 아메리카 원주민 및 백인, 기타 다인종 그룹을 포함했습니다. 

이렇게 나눈 인종 및 언어별 그룹에 따라, CHAPS 조사에 드러난 만족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선형 회귀 분석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 추가로, 성별, 나이, 교육 정도, 스스로 평가한 전반적 건강 상태 네 가지 변수를 통제했습니다. 

연구 결과 : 소수 인종/민족일 때, 영어가 주사용 언어가 아닐 때 부정적 의료 경험을 많이 한다

Weech-Maldonado, R., Morales, L. S., Elliott, M., Spritzer, K., Marshall, G., & Hays, R. D. (2003). Race/ethnicity, language, and patients’ assessments of care in medicaid managed care. Health Services Research, 38(3), 789–808. https://doi.org/10.1111/1475-6773.00147


전반적으로, 인종/민족 소수자 그룹과 비영어 사용 그룹이 백인-영어사용 그룹보다 부정적 경험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위 표에 나타난 숫자들은 백인-영어사용 그룹과 각 그룹이 응답한 점수간의 차이 (0점부터 100점 만점) 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괄호 안에 있는 숫자는 표준 오차를 의미합니다. 

백인-영어사용 그룹과 백인-비영어사용 그룹 간의 차이를 보면, '필요한 진료를 받았는가(getting needed care)'와 '진료를 적절한 시간에 받았는가(timeliness of care)'는 8점가량 낮고, '의료진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staff helpfulness, 의료진에게서 정중한 서비스를 받았는가, 존중받았는가)'는 4점가량 낮은 만족도를 보였습니다.

아시아인의 경우, 영어를 사용하는 아시아인은 영어를 사용하는 백인 그룹과 유의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는데, 비영어 사용 아시아인은 모든 항목에서 다른 어떤 그룹보다 가장 낮은 만족도를 보였습니다. 아시아인에게는 인종적 마이너리티보다 비영어 사용이 주는 장벽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스패닉의 경우, 스페인어 사용 그룹이 가장 만족도가 낮았고, 바이링구얼 -> 영어 사용 그룹 순으로 만족도 점수가 높아졌습니다. 다만 히스패닉의 경우, 아시아인-영어사용 그룹이 백인-영어사용 그룹과 만족도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과 달리, 히스패닉-영어사용 그룹은 '진료를 적절한 시간에 받았는가'와 '의료진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 항목에서 더 낮은 만족도를 보였습니다. 

보험 자체의 서비스 만족도(plan service)에서는 소수 인종/민족과 비영어 사용 그룹이 백인-영어사용 그룹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더 높은 점수를 매겼는데, 이는 메디케이드 주 정부 담당 기관에서 인종과 언어에 따른 소비자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갖추어 놓은, 조직 인프라에 대한 요구 조건이 잘 작동한 결과라고 저자들은 해석했습니다. 

결론 및 정책적 함의 : 인종, 언어와 같은 의료 접근에서의 비 재정적 장벽을 고려해야 한다
이 연구는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공공보험인 메디케이드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니, 저소득층의 의료에 대한 재정적 접근성이 보장되어 있어도 인종과 주사용 언어가 여전히 의료 이용에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특히, 적절한 시간 안에 진료를 받을 수 있었는지 여부와 의료진이 도움이 되었는지 여부에서 일관적으로 소수 인종/민족과 비영어 사용 그룹이 부정적 경험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인종/민족의 소수자성으로 나타나는 만족도의 차이보다 비영어 사용으로 인해 나타나는 만족도의 차이가 더 컸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몇 가지 정책적 함의를 보여주는데요, 첫째는 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재정적 장벽뿐만 아니라 언어와 같이 비 재정적 장벽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료진이 인종/문화적으로 더 다양성 있는 그룹이 되도록 채용하고 관리하는 것,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문화적으로 적합한 (culturally appropriate)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미국에는, 문화적으로 적합한 서비스를 개발하고 제공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인 "의료에서 문화적, 언어적으로 적합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국가적 기준 (national standards for culturally and linguistically appropriate services)"가 미국 보건복지부 소수자 건강국에 의해 제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정책적 함의로는 비영어 사용자의 의료 경험을 더 잘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꼽았습니다. 이 연구에서 사용한 설문조사인 CAHPS (건강보험에 대한 소비자 만족도 조사)를 현행의 영어와 스페인어뿐 아니라 더 다양한 언어로 번역하여 비영어 사용자의 경험을 더 많이 수집하고, 양적/질적으로 그 내용을 분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국에서 외국인 유학생으로 지내면서 병원 가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 적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공감도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이 의료 접근에서 소외되는지가 궁금한 제 연구 관심 주제와도 맞아서 흥미롭게 읽은 논문입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외국인이거나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닌 사람들은 병원 이용에 많은 어려움을 느낄 텐데요, 한국에서는 어떤 정책적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