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냥 사는 이야기

언제나 박대의 공간이었던 곳

예천. 아빠가 태어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이 있는 . 예천에 오랜만에 다녀왔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할머니가 건강하셨을 때는 설날과 추석, 년에 번씩 예천에 갔더랬다.

예천 시골집은 언제나 박대의 공간이었다. 산골 깊이 처박혀 있는 전통 깊은 종갓집에서 여자아이를 반겨줄 여력 같은 없었을 것이다. 딸아이가 9 종손의 첫째니 더더욱 그랬겠지. 존재 자체가 박대의 이유였던 . 죽거나 병들거나 질린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빈집이 되었을 때에야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그곳을 찾았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는 풀과 나무가 차지했다. 사람이 심어줘야만 자란다는 감나무는 하늘 높은 모르고 높이 솟아 번성하고 있었고 이름을 없는 온갖 풀은 한때 마당이었던 곳에 숲처럼 자라있었다.

이젠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집은 주인이 떠난 자식들이 집을 제대로 치워주지 않아 각종 가재도구며 온갖 살림살이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중엔 족보책도 있었다. "뭐뭐김씨대동보"라고 한자로 크게 있는 족보책은 11권까지 있었다.

언젠가 아빠가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불러 족보를 보여준 날이 있었다. 거기엔 이름이 적혀 있었고 나는 ' 족보니까 적혀있겠지.. 근데 어쩌라고…' 생각하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알고보니 원래 딸은 족보에 쓰고 대신 딸이 나중에 남자와 결혼을 하면 남자가 어느 본관 무슨 성씨 가문 사람인지만 적어두는 거랬다. 전통을 아빠가 처음으로 바꿔 딸들 이름도 족보에 넣어주기로 거란다. 아빠는 나에게 돌림자도 주었다. 돌림자 또한 아들들의 전유물인데, 아빠가 할아버지랑 싸워서 얻어낸 돌림자 이름이라며 엄마가 지금까지 오백여든다섯번쯤 이야기했다. 딸아들 차별이 부당하다는 알고 바꾸려 하지만, 가부장 전통 좆까라는 방법 대신 가부장 전통에 딸을 포섭하는 방식만을 취할 아는 아빠와 그런 아빠를 옆에서 치켜세워주는 엄마. 나는 아직 이걸 소화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이제 요양원에 계신다. 여러 해만에 할머니는 많이 작아져 있었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지낼 때는 할머니를 미워했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지냄으로 하여 엄마의 돌봄노동이 가중되는 싫었다. 사실 그건 할머니의 잘못이 아니었고 잘잘못을 굳이 따지자면 노인 복지 제도가 부실한 사회의 문제이거나 자본주의의 문제일 것이다. 굳이 어떤 개인에게 잘못을 묻는다면 그건 할머니가 아니라 아빠여야 했을 것이다. 본인의 엄마인데 돌봄노동은 자기 아내에게 떠밀어 버린 것이니. 그치만 나는 할머니를 미워했다. 그게 제일 쉬웠기 때문이겠지.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는 조그맸던 몸이 쪼그라들었고, 새까맸던 피부는 이상 밭일을 하지 않아 하얗게 변했고, 인지능력이 떨어져 할머니가 하는 말을 아빠조차 알아들을 없게 되었다. 이렇게 쪼그만 할머니를 그렇게 미워했는지. 이렇게 쪼그만 할머니는 엄마와 나를 그렇게 타박했는지. 이렇게 쪼그만 할머니를 그때는 돌아보지 못했다. 자기가 평생 살았던 집도 이상 기억 못하는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에도 피부가 까맸던 기억하시는지 나보고 여전히 까맣다고 했다. 할머니 기억 나는 영원히 대학생인지 학교는 끝났냐고, 지금 방학이냐고 똑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했다.

오랜만에 시골에 가니 보이는 풍경들이 좋았다. 어딜보나 산이 있고 집집마다 감나무 자라는. 모종이 푸릇푸릇 심어져 있는 논도 예쁘고 가장자리엔 쪼르르 심어놓은 옥수수도 귀여웠다. 시골집이 빈집이 되고  이상 박대와 갈등이 남아있지 않게 되어서야 그곳의 멋짐을 돌아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