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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는 이야기

일년 반만에 학교에 가게 된 건에 대하여 (feat. 팬데믹)

요새는 엄청 오랜만에 다시 학교에 가게 됐다. 지지난주에 개강했는데, 학교는 엄청 적극적이고 강경하게 대면 운영을 밀어부쳐서, 수업도 대면수업이고, 학과 건물에 대학원생 연구실도 다시 열렸고, 학교 다이닝홀(학식)도 정상 운영한다. 일년 반만에 대면 개강한 탓에 한꺼번에 쏟아져들어오는 새로운 인풋에 몸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고, 그 덕분에 막상 공부하는 데에는 시간을 많이 들이지 못했는데-- 이 글에서 개강 2주차까지 너무 널럴하게 보내버리며 이것저것 느낀 소회를 정리하고, 이제 돌아오는 주부터는 정신차리고 공부 열심히 할 수 있게 살풀이를 해보려고 한다!

미국은 지난 늦봄부터 천천히 “정상복귀”로의 움직임을 펼치다가 이번 여름부터는 거의 대부분이 다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진다. 마스크 쓰는 것만이 유일한 규제이자 코로나 이전과의 차이점일 뿐, 레스토랑도 다 열고, 학교도 정상 운영, 거의 대부분의 소셜 활동이 다 가능하고 용인된다. 세 학기만에 학교에 돌아가서 학생들이 북적북적하는 캠퍼스를 보자니 마지막으로 그런 생동감 넘치는 캠퍼스에 있었던 것이 마치 전생의 일이었던 것처럼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렇게 북적북적하는 캠퍼스를 지나다니는 건 박사과정 유학생으로서 좀 소외감이 들기도 한다. 갓 열아홉, 스무살이 된 젊은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국 현지인다운 스타일링을 하고서, 나는 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꺄르륵꺄르륵 조잘조잘하면서 내 옆을 지나가면, 왠지 모르게 조금, 아주 조오금,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 나는 굴러들어온 돌이야. 나이 많고 바쁘고 뭐가 뭔지 모르는, 저 멀리 동양에서 온 박사 유학생이야.’ 뭐 이런 느낌으로다가? ㅎㅎ

한국에서 나온 학부는 대학원생이 엄청 많은 학교였는데, 나도 한때 꺄르륵꺄르륵 조잘조잘하던 학부생이던 시절 (아니, 생각해보니, 그런 시절이 있긴 했나?ㅠ 학부생이었던 적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학교에서 보이던 수많은 대학원생들 중 가끔씩 ‘저 사람은 다른 데서 학부 다니고 여기로 대학원 온 건가보다’ 싶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냥 뭐랄까, 그 드넓고 어딘가 축 쳐진 우리 학교 캠퍼스가 좀 불편해보이고 학부생은 아닌 걸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내가 이 대학교에서 바로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사실 높은 확률로 현지인 학부생들에게 나는 보이지도 않는 길가에 있는 가로수 정도의 존재였을 테지만, 이 캠퍼스를 온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즐기고 누리고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도 내가 학부/석사 다녔던 학교의 캠퍼스는 이쪽 구석부터 저쪽 구석까지 속속들이 알고 캠퍼스 안 어디에 있든 편안할 수 있었는데. 박사유학 온 이 학교의 캠퍼스는 왜인지 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의 공간’으로 느껴져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이번 학기가 내 다섯번째 학기긴 해도 실질적으로 학교에 제대로 가는 두번째 학기고, 코로나 이전이었던 첫 학기에는 수업듣고 나면 기절하도록 피곤했고 또 이상하게 배가 너무 고팠는데 외식할 돈은 없어서, 수업 듣고 셔틀버스 타고 집에 가고 그 다음날에도 수업 듣고 집에 가느라 학과 건물 외의 캠퍼스에 있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이제는 학교에 걸어갈 수 있는 곳에 살아서 (가끔 외식할 만한 돈도 이제는 있고) 학교 갈 때마다 캠퍼스를 걸어서 가로지르는데, 그러다보니 이번 학기에야 진짜로 캠퍼스를 경험하는 것 같다. 며칠 전에는 학교 마칭 밴드가 연습하는 걸 지나가다가 봤는데 정말 미국적인 모먼트였다. 수십명의 마칭밴드 오케스트라와 그 앞에서 춤을 추는 치어리더들을 구경하는데, 이번 학기가 진짜 내 첫학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학기에 경험하고 있는 또 다른 미국적인 모먼트는 그룹 피트니스 수업이다. 이번 학기에는 수요일마다 바디펌프라는 그룹피트니스 수업을 가기로 마음 먹었고 일단 첫 두 주는 성공했는데, 바디펌프는 비트 빵빵한 가요를 틀어놓고 바벨이랑 덤벨 이용해서 전신 근력운동을 하는 수업이다. 미드에서 봤던, 특정 계층의 여성들이 문화센터 같은 곳에 모여 에어로빅 같은 거 하는 장면이 떠오르는 (예를 들면 <기묘한 이야기> 쇼핑몰 나오는 시즌..) 재밌는 공간이다. 오바 쫌 붙여서 노래 한 곡 끝날 때까지 스쿼트를 백만 번, 데드리프트를 천만 번 정도 하는 무지막지만 수업이고 삼두 운동을 할 때는 블랙핑크 노래가 나온다. 자매품으로, 비트 빵빵한 노래 틀어놓고 실내 자전거 타는 수업도 있는데 그건 차마, 정말, 너무 too much American이어서 아직 시도해보지 않았다.

수업은 두 개를 듣는데, 하나는 <사회과학을 위한 머신 러닝>이고 다른 하나는 디써테이션(학위논문) 프로포절(예심) 준비하는 수업이다. 확실히 수업에 집중하는 데에는 대면 수업이 온라인 수업보다 훨씬 훨씬 나은 것 같다. 교수님도 직접 만날 수 있고, 강의실에 다른 학생들이랑 다같이 모여 있다는 것이 집에서 낮잠 자다 깨서 눈 비비고 줌 들어가는 것보다 수업에 집중하는 데에 동기부여를 많이 해주었고, 대면수업 다녀오는 그 자체로 리프레시되었다.

이번 학기에 디써테이션 주제를 생각하고 프로포절을 써야해서 (물론 나중에 갈아엎을 수도 있지만 일단 수업 요건으로 드래프트 하나를 써서 내야 한다) 부담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꽤 받고 있다. 왜냐면 고려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떤 주제가 세상에 필요한가, 어떤 주제를 해야 내가 앞으로 2-3년 동안 안 질리고 계속 열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까, 어떤 주제를 해야 수요가 있을까, 어떤 주제로 전문가가 되어야 나중에 잡마켓에서 유리할까…… 근데 기껏 어떤 연구주제를 생각한다고 해도, 그걸 연구할 수 있는 공공 데이터가 있나? 공공데이터가 없으면, 비싼 유료 데이터를 어떻게 얻지?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혼자 생각만 할 게 아니라 부지런히 찾아보고 부지런히 기존 연구들 읽고 부지런히 공부를 하면 되는 일인데. 디써테이션 관련 공부는 안 하고 눈앞에 닥친 프로젝트 논문 쓰는 데에만 급급하다보니까 맨날 스트레스만 받고 진전은 없는 상태가 계속된다.

비슷하게, 이번에 <사회과학을 위한 머신러닝> 수업에서 텀페이퍼를 하나 써야하는데, 그와 관련해서 아주 멋지고 중요하고 재밌을 것 같고 우리 분야에 머신러닝을 적용한 선구자적인 연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주제가 하나 생각났는데, 이것도 ‘와, 진짜 이거 제대로 연구하면 대박일 듯’ 생각만 하고 정작 선행 연구 찾아보는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많이 읽고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는데, 언제쯤 나는 충분히 읽고 공부하는 박사과정생이 될 수 있을까!

지난 주에 친한 동기 만나서 "I feel I'm not reading as much as I should. (읽어야 하는 만큼 읽고 있지 않는 거 같아)"라고 했더니 "No one is. It's okay. (다 똑같아. 괜찮아.)"라고 해주었지만.. 사실은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했을 뿐 진실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글을 올림으로써 내가 지난 2주 얼마나 재미있게 살았고 공부는 안 했는지 만천하에 (이 블로그 와주는 한꼬집의 사람들에게) 알렸기 때문에 오늘부터는 좀 더 생산적으로 논문을 읽고 생각하고 배우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풍등에 소원 적어서 하늘로 날려보내는 것처럼 나는 블로그에 글 적고 발행하는 행위로 나의 소망을 기원해보기로 한다. (제발!)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