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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는 이야기

미워하는 사람에게 다정한 편지 쓰기 - 할머니에게

(5년 전 글쓰기 모임에서 "미워하는 사람에게 다정한 편지 쓰기"라는 주제로 썼던 글이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00이에요.
이 편지를 써도 할머니는 글을 읽을 줄 모르니까 제가 소리 내어 읽어드리지 않는 한 할머니는 이 편지 내용을 영영 모르시겠죠. 하지만 저는 서울집에 올라가도 할머니에게 인사조차 드리지 않으니까, 이 편지를 읽어드릴 일도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제 마음을 담아 할머니께 편지를 써요. 제가 인사를 드리지 않아도 할머니는 제가 집에 왔다는 걸 알고 계시겠죠? 인사를 드린다면 할머니는 언제나처럼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고 얼른 밥을 먹으라고 하시겠죠. 같은 집에 살면서 인사조차 하지 않아서 죄송해요. 저는 할머니를 미워하기 때문이에요. 할머니를 미워해서 죄송해요.
십 년 조금 넘게 제 방이었던 공간이 이제는 할머니 방이 되었어요. 그 방에서 할머니는 이불귀신처럼 온종일 가만히 누워만 계시죠. KBS1 번이 틀어진 텔레비전 앞에요. 가끔 지팡이를 짚고 온몸을 떨면서 다섯 걸음 거리의 화장실로 힘겨운 걸음을 떼기도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제 방은 지내기에 그다지 좋은 공간이 아닌데, 그 방에서 종일 누워 지내는 어떠신가요. 코딱지만 한 창문에, 그 바로 앞에는 또 다른 빌라가 서 있어서 해도 들지 않고 창밖 풍경도 보이지 않는 그 방이 갑갑하진 않으실까 걱정돼요. 저는 고등학생 때엔 그 방이 감옥 같아서 도서관으로 도망치곤 했는데, 할머니는 어딘가로 도망칠 기력도 없으시니까, 꼼짝없이 그 감옥에 갇혀 지내셔야 하잖아요. 그 방에서 할머니는 행복하신가요?
몇 년 전, 할머니가 지금보다 훨씬 더 건강했을 때, 할머니 혼자의 힘으로 걸을 수도 있고 정신도 훨씬 맑으셨을 때, 할머니는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파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다녀야겠다고 하면서 우리 집으로 오셨죠. 정확히는, 그런 할머니의 전화에 우리 아빠가 쏜살같이 예천에 내려가서 할머니를 데려왔어요. 우리 아빠는 언제나 가만히 있는 사람인데, 그때만큼은 가만히 있지 않고 정말 빠르게 무언갈 했어요. 할머니가 처음 우리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엄마는 제게 스쳐 지나가듯 말했어요. 덫에 걸린 것 같다고요. 할머니는 어떤 병에 걸려서 아픈 게 아니었어요. 할머니는 나이가 많이 들었고, 나이가 많이 들면 몸도 자연히 같이 아파지는 것인데, 할머니는 그걸 모르셨던 걸까요. 하긴, 누가 그걸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할머니의 아픔은 어떤 치료하면 낫는 병이 아니었고, 그래서 할머니는 우리 집에 눌러앉게 되셨죠. 그래서 잠시 빌려준 것일 줄 알았던 제 방은 영영 할머니의 방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덕분에 제가 서울집에 가면 동생 성현이와 저는 피난민처럼 이 방 저 방 돌아가며 잠을 자요. 제가 성현이 방에 들어가서 자면, 성현이는 엄마가 일하는 방에 가서 엄마가 일하는 책상을 잠시 옆으로 치우고 자기도 하고요. 아니면 제가 거실에서 자기도 하고요. 할머니는 이런 걸 아시는지 모르겠어요.
할머니는 우리 집에 온 뒤로 갑자기 많이 늙으셨죠. 시골에서 마당에는 상추랑 닭을 키우고, 뒷산 들에는 깨랑 고추를 기르던 할머니가 서울 우리 집에 와서 방에 누워만 계시다 보니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무거워요. 종갓집의 고된 일로 언제나 허리가 굽어 계셨던 할머니지만 그래도 '착착착착' 멀리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발소리를 내면서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셨던 할머니였는데. 우리 집의 시멘트 벽면이 할머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할머니를 거실에 계시도록 받아주지 않은 우리 가족의 탓일까요?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가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이 없어요. 저에게 할머니는, 음, 성현이의 할머니이거나 아빠의 엄마이거나 엄마의 시어머니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몇몇 장면들만이 기억이 날 뿐이에요. 동생이 태어나고 처음 시골집에 갔던 날,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할머니가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오셨어요. "아이고, 성혀이 왔나. 아이고야, 성혀이라. 얼른 드와라." 그 옆에는 팔 년 먼저 태어난 저도 있었고요, 성현이를 안고 있던 엄마도 있었고요, 아빠도 있었는데요. 그 전까지는 "아이고, 동학이 왔나."하시던 할머니가 이제는 성현이를 찾으시더라고요. 저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별이 쏟아질 것 같이 많이 떠 있는 밤이었어요. 
할머니가 우리 엄마가 만든 고추전을 젓가락으로 휘휘 뒤저은 날도 기억이 나요. 안방에 남자들 상을 다 차려주고 주방에 여자들끼리 앉은뱅이 상을 펴고 아무렇게나 밥을 떠놓고 먹고 있을 때였어요. 할머니는 고추전을 젓가락으로 뒤집으며 "아이고 세상에 누가 고추를 전 부쳐 먹나." 하셨죠. 우리 엄마는 "어머니, 고추를 왜 전을 안 부쳐 먹어요. 다들 그렇게 먹어요." 했고, 할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세상에 고추를 전 부쳐 먹는 사람은 없다는 말을 반복하셨어요. 그때 내가 고추를 잘 못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 고추전을 제 밥그릇으로 몽땅 가져와 와작와작 맛있게 씹어먹었을 거예요.
또 어느 명절 어느 날에는, 이상하게도 저 빼고 전부 남자아이들인 사촌들과의 놀이에 끼지 못하고 저 혼자 덩그러니 안방에 남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 저에게 할머니가 오셔서 말씀하셨죠. 마당에서 동생들이랑 놀아주든지 주방에서 엄마들 도와주든지 해야지 여기서 혼자 놀고 있다고요. 그래서 저는 엄마가 있는 주방에 갔어요. 엄마와 작은 엄마들은 네가 뭘 할 게 있냐고 그냥 옆에 앉아서 구경이나 하라고 했어요. 그런 저를 다시 발견한 할머니는 다 큰 애가 엄마 치맛자락만 졸졸 쫓아다닌다고 했어요. 저는 당황스러웠어요. 그러면 저는 어디에 있었어야 했을까요, 할머니. 안방도 주방도 마당도 이 세상 어느 곳도 아니었겠죠. 아마도 엄마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 여자아이로 잉태되던 그 순간을 바로잡아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삼척김씨 교위공파 9대 종손 김동학의 첫째 자식으로 태어날 거면서 여자아이로 수정된 때부터 저의 잘못이 시작되었을 거예요.
요즘에는 가끔 할머니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 상상해봐요. 종갓집이래서 시집을 왔더니 시아버지는 여자끼고 노름하느라 땅을 다 팔아먹어서 남아있는 땅도 없었다고, 그 와중에 당신보다 어린 시동생이 둘이나 있었다고 하셨죠. 열 몇 살에 예천의 어느 깊은 마을로 시집온 할머니는 그 어린 두 시동생을 업어 키워 중학교까지 보냈어요. 그 와중에 딸을 연달아 다섯을 낳았죠. 어느 집안 8대 종손의 아내로 들어와서 딸을 낳고, 딸을 낳고, 딸을 낳고, 또 딸을 낳고, 그다음 아이가 또다시 딸이었을 때, 할머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여섯 번째로 낳은 자식이 고추를 달고 나올 때까지, 그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의 시집 식구들은 할머니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엄한 년을 잘못 들여와 딸년만을 낳아 재낀다는 말을 듣지는 않았을까요. 그 집에서 할머니는 외롭지 않았을까요. 그러다가 여섯째로 드디어 아들을 낳았을 때 얼마나 큰 안도감을 느꼈을까요. 그렇게 힘겹게 대를 이어놨는데, 그 아들이 대를 잇지 못할까 봐 얼마나 조바심이 나셨겠어요. 그러니 성현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정말 기뻤을 거예요. 할머니의 커다란 기쁨만큼, 엄마와 저의 기분은 조금 이상했지만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이 생각이 나요. 대전에서 전화를 받고 급히 예천의 장례식장으로 찾아갔어요. 할머니는 바닥을 치며 엉엉 우셨어요. 저 조그만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 큰 울음이 날까, 많이 놀랐었어요. 스물한 살의 철없던 저는, 팔십이 되면 주변 사람들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봐요. 여든의 나이에도 배우자를 잃는다는 것은 저렇게 슬픈 일이구나, 생각했었어요. 할머니는 오래 많이 슬퍼하셨던 것 같아요. 지금에서야, 여든 살이 된 미래의 제가 제 애인과 사별하는 일과 그 시절을 살아낸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사별하는 일은 아주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그저 남편이 아니라, 할머니의 보호자이자 의사결정권자이자…. 그냥 할머니의 모든 것이었을 거에요. 초등학교도 가지 못해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 할머니를 대신해 할아버지가 모든 일을 처리하셨을 거예요. 할머니의 일평생 동안 할머니는 이복이가 아니라 김가네 맏며느리, 김대하의 아내, 그런 이름으로 존재했을 거예요. 경상북도 예천의 단단한 가부장제 안에서 일평생 동안 할머니의 모든 것을 차지했던 할아버지가 떠나셨으니, 그 커다란 상실은 제가 감히 상상할 수 없겠죠.
그러니, 할머니는 다른 의지할 곳을 찾으셔야 했을 거예요. 할머니 혼자 계시기엔 예천의 집은 너무 넓었으니까요. 할아버지의 빈자리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가 애지중지 키우던 소들이 지내던 공간도 모두 텅텅 비어버렸고요, 그 대신으로 키우려 했던 닭은 데려오는 족족 삵이 잡아간다고 하셨죠. 수많은 별만 까마득히 반짝이는, 바람 소리 사이사이로 이따금 옆집 개가 짖는 소리만 들려오는 시골집에서 할머니는 매일 밤이 너무 길었을 거예요. 장남인 우리 아빠를 제일 먼저 떠올리고 수없이 전화하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여덟 형제 중에 장남이라고 유일하게 대학 보낸 그 자식이 서울에 어엿이 자리를 잡았으니까, 믿을 구석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몰라요. 우리 아빠는 밤에 몸 누이는 곳이 서울일 뿐 사실은 개털인데도요. 아니면 장남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셨으려나요. 그래도 우리 집에는 할머니에게 내어줄 방이 있었어서 다행이에요. 덕분에 저랑 성현이는 개구리처럼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잠을 자지만요, 그럴 수라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편지를 쓰다 보니, 그래도 적막한 시골집보다는 사람 사는 소리가 나는 네모난 시멘트 방이 할머니에게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할머니는 하루 세끼를 드시죠. 할머니의 아침은 아빠가 새벽에 잠시 일어나서 차려드리고, 점심은 엄마랑 아빠가 함께 준비하고, 저녁은 집에서 일하는 엄마가 업무 시간 중에 나와서 차려드려요. 할머니는 한 꺼풀 가죽만큼 쪼그라들었지만 이십 대인 저보다 많이 드세요. 할머니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요, 저는요, 할머니가 그렇게 잘 드시는 게 너무 무서워요. 그렇게 잘 드신 덕분으로 오래도록 기력을 잃지 않고 오래도록 살아계시면 어떻게 하지, 걱정이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아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너무 죄스러워서, 학교 상담센터에 가서 이 이야기를 하다 상담실이 떠나가라 엉엉 울었어요. 그런데 정말요,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 집은 집이기도 하지만 엄마의 일터이기도 한데, 엄마가 매일 할머니 밥을 차려드려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저는 가슴이 갑갑해서 미칠 것 같아요. 우리 엄마도 삼 년 전에 큰 수술을 해서 가끔 많이 아픈데, 그런 우리 엄마의 밥은 누가 차려줄까요? 우리 엄마는 언제까지 할머니의 밥을 차려드려야 할까요? 할머니, 이런 생각이 드는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