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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는 이야기

온라인 학회 참여 후기 - 미국 가족계획학회 (Society of Family Planning)

최근에 온라인으로 미국 가족계획학회의 온라인 학술발표회를 들었다 (Society of Family Planning (SFP) Annual Meeting). SFP 학회는 피임과 임신중지라는 두 주제를 필두로 하여 여성의 재생산 건강, 재생산 건강권에 대한 연구들을 발표하는 곳이다. (https://www.societyfp.org/annual-meeting/)

나는 이번 학회에서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관심 가지고 있는 연구 분야여서 현재진행형인 연구들 발표를 들으면서 다른 연구자들은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 배우고 또 이 분야에 어떤 사람들이 있나 보려고 학회에 참가했다. 올해는 온라인으로 열려서 여행 비용이 들지 않고, 규모가 작은 학회여서 참가비에도 부담이 없어서 가능했다.

이번 학회는 열심히 참가하고자 하는 모티베이션이 있었다. 첫쨰로는, 지난 6월에 다른 온라인 학회에 등록해놨었는데 (그건 보건경제학회였다 ASEcon) 그때는 퀄시험 준비한다고 너무 정신이 없고 번아웃이 돼서 학회 참여를 하나도 못했었고, 이번에는 그때랑은 다르고 싶었다. 둘째로는, 이제 3년차가 되면서 내 관심사가 뭔지, 어떤 걸 연구하고 싶은지 좀 더 명확해졌는데 이 학회가 그 관심사랑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서 열심히 듣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셋째로는, 얼마 전 졸업하고 조교수로 임용된 우리 과 선배를 만났는데, 네트워킹이 정말 중요하고 학회에 가서 네 존재를 열심히 알리고 사람들이랑 얘기하라는 조언을 해줘서, 이번 학회에서 질문이라도 몇 개 해서 내 이름을 좀 보이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한달 뒤에 대면 학회에 참여하는데, 대면 학회 가기 전에 여기서 네트워킹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회 본 발표 일정 전에 있는 네트워킹 세션들에도 처음으로 참가해 봤다. 그동안 참가했던 학회들은 이것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크기도 했을 뿐더러, 작년까지는 내가 아직 ‘그런 곳에 낄 주제가 안 된다’라는 생각을 했어서, 이런 네트워킹 세션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 학회에서는 네트워킹 세션들 일정도 관심 가지고 살펴보았고, SFP학회에 처음으로 참가하는 사람들을 위한 네트워킹 세션(first attendees’ social)이 있길래 자신감을 가지고 이 세션에 참여했다. 거기서 서너명씩 랜덤으로 줌 소회의실로 나눠줘서, 한 십분 간 한 방에 배정된 사람들끼리 통성명하고, 그 십 분이 지나면 새로 소회의실을 만들어서 또 새로운 서너명과 통성명을 하고,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사실 아주 스쳐지나가는 만남이었고 거기서 어떤 의미있는 만남을 만들지는 못한 것 같은데 그래도 이런 세션에 참가를 해봤다는 것 자체만으로 자신감이 좀 더 생겼고, 이 온라인 학회에 좀 더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포스터도 하나하나 다 열어보고, 열심히 읽고, 몇 연구에는 질문하는 댓글도 달았다. 포스터는 크게 임신중지, 피임, clinical practice, training/education으로 분야가 나눠져서 올라와있었는데, 나는 적어도 임신중지 주제로 올라온 포스터를 다 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서른 개 정도의 포스터가 있었는데, 목표대로 임신중지 주제의 포스터들을 대충이라도 다 훑어봤고, 그 중에서 한 대여섯 번 정도는 질문을 남겼다. 질문이 딱히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고, 어떤 질문이 생각 났어도 그게 너무 멍청한 질문일까봐, 근데 그걸 댓글로 남기면 스스로 나의 멍청함을 모두가 보는 앞에 박제하는 꼴이 될까봐, 혹은 너무 멍청해서 저자에게 실례가 되는 질문일까봐, 질문 남기는 게 망설여지고 마음이 힘들었다. 그래도 이번엔 이상하게도 ‘이번은 평소랑 다르고 싶다’는 생각이 엄청 강했고, 그래서 나 스스로를 좀 푸쉬해서 눈을 딱 감고 첫 질문을 남겼다. 첫 질문 댓글을 달고 나니까 신기하게 마음이 가벼워졌고, 그 다음부터는 좀 덜 고민하고도 질문 댓글을 달 수 있었다. 개중에는 “That’s an interesting question…”으로 시작하는 좀 떫떠름한 투의 답변도 받기는 했지만, 사실 몇개 질문은 내가 질문하면서도 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아는 경우도 있었고 (연구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연관 있는 내용에 대한 코멘트여서) 답을 듣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기 보다는 내가 질문을 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엔 학회 사이트에 특이한 기능이 있었는데, 서로 네트워킹과 온라인 참여를 증진시키기 위해, 세션 참가나 댓글 남길 때마다 포인트를 주고 1등부터 15등까지의 명단과 점수, 그리고 내 점수를 보여주는 페이지가 있었다. 지금까지 세번 온라인 학회에 참여했는데, 플랫폼이 다 달랐어서 경험이 다 달랐고, 그중에서도 이번이 제일 ‘학회에 참여한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실제로 그 포인트가 꽤 큰 역할을 했는데(적어도 나에게는), 발표 중간 중간에 남들 다 채팅으로 서로 얘기하고 질문과 답변 주고 받을 때 나는 발표 듣는 거 자체만으로 이미 뇌용량 풀사용이어서 채팅 따라갈 여유는 없었기에 이미 내 포인트는 순위권과는 굉장히 멀어져있었지만(줌 채팅도 댓글처럼 카운트되어서 올릴 때마다 포인트가 쌓였다), 그래도 그 포인트 좀 더 받고 싶어서 ‘아, 뭐 질문할 거 없나?’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든지와는 상관없이 일단 눈에 보이는 보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고, 그래서 대학원 생활이 힘든 것이라는 뜬금없는 생각까지 했다. 대학원 생활 하면서도 수업 제 시간에 가면 25포인트 띠롱- 쌓이고, 아침에 잘 일어나면 또 25포인트 띠롱-, 숙제 잘 내면 100포인트 띠롱-, 논문 제출하면 500포인트 띠롱-, 논문 억셉되면 또 500포인트 띠롱- 쌓이면 하루하루가 재밌을텐데, 하는 상상을 해본 N이었다. (MBTI를 믿으시나요?)

SFP 2021 온라인 학회의 게임보드 페이지 캡쳐

학회 마지막 일정은, 임신중지와 관련된 영화를 다같이 보는 세션이 있었다. 작년에도 이렇게 영화를 다같이 보면서 마무리했다고 하는데, 올해 본 영화는 <Unpregnant>였다 (링크). 제목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임신 되돌리기> 혹은 <임신 그만하기> 정도가 되려나. 영화는 미주리에 사는 십대인 주인공이 두 줄이 뜬 임신테스트기를 확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미주리 주는 미성년자가 임신중지를 하려면 모부의 동의를 받아오기를 요구하고, 주인공은 독실한 기독교인인 엄마에게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모부 동의 없이 미성년자가 임신중지를 받을 수 있는 뉴멕시코로 로드 트립을 떠나기로 한다. 다같이 영화를 보면서 채팅으로 감상을 나누는 게 정말 재밌었고, 이 커뮤니티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다. 멍청하고 해로운 전남친이 등장할 때면 다같이 욕을 하고, 반임신중지 사상을 가진 기독교인이 등장할 때면 다같이 탄식을 하고, 임신중지 시술 과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 장면이 나오자 다같이 박수 이모지를 보내고. 학회 주제와 관련이 있는 영화를 함께 보면서 얘기 나누며 학회를 마무리 하는 게 정말 신박하면서도 좋은 방식의 마무리라고 생각했다.

여러 모로 재밌고 유익한 학회 참여 경험이었다. 참가자 중에는 메디컬 쪽 사람들이 많았고 발표도 그쪽 연구들이 대부분이어서 내 연구랑 정확하게 매치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주제가 관심이 가는 거다보니까 나름 집중해서 계속 듣게 됐다. 창밖에선 햇살이 쏟아지고 날씨도 좋은데 이틀 내내 학회 발표 듣고 포스터 본다고 정신없었고 체력을 완전히 소진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학회 발표나 세미나를 이렇게 정성들여서 열심히 들은 게 정말 오랜만이어서 뿌듯했고 기분이 좋았다.

근데 이번에 여기서 학회를 들어보고 느낀 점이, 나는 임신중지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예를 들어, 임신 중지와 관련된 경험 파헤치기 등) 사회구조적인 요소(법, 정책, 구조적 차별 등)가 여성에게 억압으로 작용하고 그 결과 여성이 더 아프게(포괄적의미에서) 되는 것에 문제의식을 크게 느끼고 있고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서 임신중지 규제와 그 결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평소에 공부하던 분야에서는 [[정책의 변화 —> 의료 이용에의 변화, 건강의 변화]] 를 살펴보는 도식이 너무 디폴트로 여겨져 있어서 어느새 그런 연구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HSR분야 바깥의 보건학 연구, 혹은 메디컬 분야 연구 발표들을 보니 내 연구 관심 주제에 대해서, 그 주제 자체만이 아니라, 이 주제가 위치한 곳을 좀 더 알게 되었다. 이번 깨달음을 바탕으로 학위논문 주제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구체화시켜나가야겠다.

내년에는 이 학회가 대면으로 진행하는데, 그때는 현장에 가서 발표할 수 있게 한 해 동안 뚠뚠 열심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