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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는 이야기

재성운이 없는 사주를 가졌다네 하지만 나에겐 학당귀인이 있어

“사주 상 화기운이 없는 무재성 사주를 가지고 계세요”

지난 주말에 처음으로 내가 직접 문의한 사주풀이를 받아봤다. 그동안 엄마가 어디 사주 보러 다녀와서 너는 이렇댄다, 앞으로는 저렇댄다, 하고 전해주는 것을 흘려들었던 것 말고 내가 직접 사주풀이 의뢰를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방학 마지막 주말이라고 옆옆주에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넷플릭스 피어스트리트 삼부작을 어머나 저머나 쟤는 왜 저러나 평하면서 보고 있는데, 사주풀이가에게서 오픈카톡이 하나씩 오기 시작했다. 악마가 어쩌구 하는 미국의 민간신앙 세계관(뭐, 따지고 보면 기독교 세계관이긴 한데 나는 이게 미국의 민간신앙이라고도 생각한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공포영화를 보는 와중에 한국의 민간신앙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사주 풀이를 받아 보았네.

나는 사주에 화(火)가 없어서 무재성 사주라고 했다. 재성운은 일거리, 일복, 돈을 뜻한다고 했다. 재성이 없는 사람들은 돈을 잘 못 모은댔다. 얼마를 벌든 번 만큼 쓰는 사주란다. 재성운이 없는 사람이 투자에 손을 대면 원금 상환이 어렵다고 했다.

뭐야, 흥, 웃기고 자빠졌네. 기분이 나빴다. 앞으로 평생 가난할 것이라는 저주를 들은 것만 같이 느껴져서 ‘네가 내 인생에 대해 뭘 알아!’하는 반발심이 생겼다.

그런데,

“남들은 재테크를 할 동안 00님은 지출계획을 세우는 편이시니ㅠㅠ”

이 말을 듣고는 조금 뜨끔했다. 최근에 학교에서 코로나재난지원금 같은 걸 신청자들에게 나눠주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금액이 많길래 이번 여름방학에 초과 지출한 카드빛 갚고도 남을 돈이라서 그걸로 예전부터 계속 사고 싶어서 드릉드릉했던 고프로를 사려고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네 집에 가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엄마랑 영상통화 잠깐 할 때도, 엄마가 “유튜브에서 남의 브이로그만 봤지 딸래미가 미국에서 돌아다니는 거 이렇게 보니까 재밌네”해서 조만간 고프로로 영상을 더 많이 찍어서 엄마 보여줘야지 생각하며 고프로를 사겠다는 생각은 역시나 옳은 선택이라고 확신까지 하고 있었는데. 남들은 이 코로나재난지원금으로 투자할 생각 하고 있나? 진짜?

나는 지금까지 돈이 잘 안 모이고 자꾸만 돈이 모자라기만 한 것이 내가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돈이 절대적으로 적으니까, 그 한줌짜리 돈으로 먹고 사느라 밑빠진 독에 물붓기 하는 느낌인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 삼 년 혹은 사 년 뒤에 박사 졸업을 하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학생이 아닌 직업을 가지게 되면 이제 돈은 모일 일만 남았고 나는 이제 차도 사고 어디 보호소에서 강아지가족도 데려오고 베란다 있는 집에서도 살고, 그니까 내 인생 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번 만큼 쓰는 게 내 사주라고 하니까 좀 속상하고 허탈하고 화도 났다. 아니, 나는 미국에서 저소득층에 해당하는 대학원생 월급 받으면서 저축도 하는데! 내 미국 주식 수익률 흑자인데! 투자금으로 무분별하게 투자해서 원금을 잃는 사주라니! 이번 주말 여행에 메고 간 배낭은 2015년에 교환학생 갈 때 사서 아직도 새거처럼 쓰고 있는 가방인데! 맨날 들고 다니는 스누피 그려진 에코백은 2016년인지 17년인지에 이니스프리 사은품으로 받아서 아직까지 쓰는 건데! 트위터에서 누가 “저소득층은 애차개쓰 없이 살아야만 계급 상승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한 말을 듣고 (애차개쓰: 아이, 자가용, 반려견, 예쁜 쓰레기) 계속 주문처럼 되뇌이면서 차도 안 사고 반려동물도 안 들이고 예쁜 쓰레기(..)는 조금만 가지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데!

사실 “얼마를 벌든 번 만큼 쓸 일이 생기는 사주”라고 한 거여서 평생 돈을 적게 번다는 말이 아닌데도 절망하고 말았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나는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매일 매일 참으면서 살고 있는데, 그 노력을 치하해주는 풀이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 방향의 풀이가 나와버린 게, 이 매일매일의 고군분투를 아무것도 아닌 걸로, 그저 운명의 흐름인 걸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사주가 뭐라고, 이렇게 돈을 내서 풀이를 의뢰하고, 풀이 한마디 한마디를 곱씹으면서 자꾸만 신경쓰게 되는 걸까? 나는 별자리운세는 전혀 믿지 않고, 하나님 혹은 하느님이 세상천지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도 믿지 않고, 윤회한다는 이야기도 믿지 않고, 인간사를 관장하는 어떤 신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데—

지난 봄에, 퀄 시험 (박사자격시험) 준비를 하는데 너무 힘들고 막막해서, 이 어려운 시험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답답한 마음에 사주 어플을 받아서 내가 무슨 사주를 가지고 있는지를 찾아봤었다. 무슨귀인 무슨살 막 이렇게 나오는데, 눈에 띄는 것부터 하나씩 찾아보니 어쩌구귀인은 공부에 재능이 있는 귀인, 저쩌구귀인도 공부를 통해 관에 오르는 귀인, 심지어 살도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속세에서 멀어져 쓸쓸해지는 이러쿵살이 있다 하고, 거기에 땡땡귀인이랑 뿅뿅귀인은 각각의 풀이는 공부랑 관련이 없는데 이 두개가 같이 있으면 그게 또 공부해서 관직에 오르는 사주라 하고, 역마살이랑 지살이 또 붙어있었다.

그걸 보니까 정말 힘이 되었다. 나는 공부를 하는 사주구나, 게다가 해외에서 공부할 사주구나. 그러니까 이 학위과정을 하는 것이 내가 타고난 운명을 따르는 일이구나. 그러니까 이 박사자격시험도 결국은 잘 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사주풀이를 꼭 붙잡는 것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되었다. 학문에 길이 있다는 내 사주에 대한 믿음은 지금은 더더욱 굳건해져서 나는 사주에 이런귀인과 저런귀인이 있기 때문에 박사 졸업을 무사히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연구도 잘 할 수 있고 지금 쓰고 있는 논문도 결국엔 잘 퍼블리쉬될 것이라고, 학업에 자신감이 흔들릴 때마다 꺼내서 외우는 주문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 사주에서 내가 혼자 인터넷 찾아본 무슨귀인 어떤귀인 땡땡귀인은 다 믿으면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거라는 오행에서 화가 없다, 즉 재성운이 없다고 사주쟁이가 풀이해 준 것은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주풀이를 받은 날, 마침 인스타에 한 친구가 “사주에서 포닥 가라 한다고 포닥 가면 멍청한 건가요?” 예 vs 아니오 투표 올렸길래 재빨리 ‘아니오’에 투표하고선, 이 친구 사주에 그냥 아무데서 포닥하는 거 말고 굳이 미국에서 포닥하라는 내용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그래서 내 근처 지역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디엠을 보냈다. “너도 사주 믿니? 야너두? 야나두!”

이 친구가 말하길, 사주 오행에 화(火)가 없으면 검지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면 좋다고 했다. 일견 허무맹랑한 소리 같지만 나는 사주를 철썩같이 믿으니까 조만간 금반지를 맞출 수도 있겠다. 반지 맞추러 가기 전에 왼손 검지인지 오른손 검지인지 아무 검지나 상관없는지 다시 물어봐야지.